근처에.그녀는 자신에게 사로잡힌 회장님의 눈빛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당연히 받으셔야죠. 수지가 계약을 못 지켰으니까요.』『그것만으로도 나한테는 소중한 사람이었지.』『그러니 부모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어. 죽은 것도 서러운데 그런 소문까지 나도니 말야. 다 내 탓이야.』『만나야죠. 은비가 설령 나를 잊었다고 해도 나는 은비를 만나고 말 겁니다. 난 6년 동안 은비한테 영혼을 투자했어요. 그게 억울해서라도 꼭 찾아갈 겁니다.』『나중에 알게 될 거야. 우선 희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희수는 내가 물에서 만난 두번째 여자야. 썸너 별장에서 왜 나에게 무릎을 내주었지?』허순화는 별수없이 두 손과 입을 사용해 그놈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도 그놈은 여전히 꼿꼿하게 머리를 곤두세운 채 비웃고 있었다.상미는 희수의 결심에 우려의 뜻을 밝혔다.어쨌거나 지난 연말연시에 남편은 혹독한 시련을 겪은 게 틀림없었다. 그에 비해 같은 기간 동안 상미는 환상의 세계를 체험했다. 이동선과 맺은 두 번의 정사를 그녀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좀 묘해. 연인 같기도 하구, 부부 같기도 하구, 그냥 동업자 같기도 하구. 그런데 어떻게 됐어?』『근데 만나 보면 점잖고, 그치?』그가 18 단계의 주당을 써내려 갈 때 다른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필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당의 종류가 저리 많은가 싶은 호기심도 작용했지만 그보다도 그의 한자 휘갈기는 손맵시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영화감독 최민재가 마릴린 먼로를 들먹일 때부터 희수는 바싹 긴장했다. 거기서부터는 대본에 없는 자유발언으로 진행되는 코너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작가와 사전에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상의하긴 했지만 막상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보면 출연자들은 주눅이 들게 마련이었다. 희수는 손바닥에 배인 진땀을 바지에 문지르며 최민재 감독을 주시했다. 최 감독은 멜러물의 거장답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힘 없이 풀어 나가고 있었다.『그럴 리가 있나?』『그럼 왜 저한테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라디오 프로그램만 놔두고 TV쪽 일은 가급적 맡지 않았다. 기획부터 제작 회의, 구성안과 편집 대본, 녹음 대본을 작성해야 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나 덩치 큰 드라마를 소화해내기엔 너무 마음이 심란한 까닭이었다.그들은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리마 시내를 함께 쏘다니며 쇼핑을 했다. 자신을 대그룹의 부장이라고 소개한 50대 사내의 이름은 이케다(池田)였다. 이케다는 은비에게 터키석으로 만든 브로치와 잉카 문명의 나스카 지상그림을 새긴 순은제 쟁반을 선물했다. 그 선물의 가격이 천 달러를 넘었다. 그리고 송년의 밤을 함께 보내는 화대로 삼십만 엔을 받았으니 특별한 고객임에는 틀림없었다.일권은 난로 앞에서 손바닥을 비볐다. 그리고 은비가 애송했던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沙平驛)에서를 읊조렸다.미녀는 대수롭지 않게 영감들 쪽으로 걸어가 손을 내민다. 그러자 영감들이 손에 쥐고 있던 달러를 내민다. 미녀는 능숙한 솜씨로 돈을 낚아채어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간다.『그나저나 사정이 안됐군.』방 안을 쓸고다니며 난리를 피우던 연화가 암실까지 들어가 앨범이며 사진들을 집어던졌다. 동선의 등 뒤에 무수한 사진들이 나부끼며 뒹굴었다.지금은 새벽 다섯 시. 새해 첫날 신새벽이지만, 그들은 어제이면서 지난 해이기도 한 간밤의 황량한 분위기를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몇은 감기에 쿨럭거리고『무슨 일 있었어요, 형?』병사들이 막 바리케이드를 내리려는 순간, 뉴그랜저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완장을 찬 병사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미남이야?』『남녀관계란 한 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번지는 거 아닌가요?』I?아아!『그렇군요. 엉뚱한 데서 날아온 돌멩이를 맞은 셈이네요.』물론 일권을 의심한다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의 성격이나 행동으로 미루어 신문사에 투서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그는 희수의 입장을 난처하게 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제가 불편할 게 뭐 있겠습니까? 화숙 씨 때문에 그러는 거죠.』『그런가? 그때 희
